아이들이 집을 떠나고 난 후 간혹 불안한 마음이 일 때면 기도를 한다. 어쩌다 자신들이나 친구들의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알려 올 때는 엄마가 기도할께 하고. 삼십 전 후로 이젠 어른이 된 내 아이들은 나처럼 크리스쳔이 아니지만 그럴 때 마다 엄마 땡큐 한다. 굳이 사양하지 않는 것은 기도로 희망을 품는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는 거겠지. 기도로 잔잔해지는 엄마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걸 안다. * * * 우리 자랄 때 엄마는 점장이한테 다녔다. 입학시험등 중요한 일들을 지날 때면 장안의 이름 난 점장이들을 찾아다니며 우리들 운세며 그날의 길.흉을 점쳐서 부적도 써 받고 길일, 좋은 방향 찾아주느라 종종 걸음 치셨다. 옷속에 붙인 부적을 찾아 엄마 몰래 떼어 버린 적도 여러번 있었다. 그러다 중년을 넘겨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셨다. 이젠 어언 여든 중반되신 우리 엄마 혼.자. 사신다. 쓸데 없는 일들에 바쁘다가 문득 전화드리면 아이들이랑 우리 부부 건강 물으시고 잘들있지 하신다. 엄마가 자식들 손주들 보고 싶은 마음을 안부의 궁금함을 하나 하나 얼굴을 떠올리며 기도하시며 위안을 얻으시는 걸 나는 안다. * * * 시댁의 시외할머님은 일찍 주무시고 일찍 일어나시는게 몸에 배인 분이셨다. 무남독녀 외딸 부부와 다섯 손주 그리고 그들의 배우자들과 증손주들까지 모두 합쳐 스물여섯이나 되기까지 손이 발이 되도록 일생을 먹이고 기르는 일로 보내셨다. 가끔 허리를 펴실 땐 담배 한대 맛있게 천천히 태우시면서 자손들 하나 하나 꼽으시며 좋은 점들만 하나하나 들추셨다. 여든 아홉 생신 땐 세 손주 며느리랑 증손주들한테 둘러싸여 케이크 촛불 불어 끄시곤 너희들 내 나이 내 건강 물려라 푸근하게 덕담하셨던.... 시외할머님은 아흔 여섯까지 장수하셨다. 아주 푸르게 젊은날 홀로 되신 후로 푸념과 불평할 시간없이 오직 자손들만을 위해 숨쉬는 날들을 쓰시며 어미 로 사셨다. 기독교 여학교를 다니고 교회의 권사인 딸 ( 나의 시어머니)이 다니는 교회에서 목사님이랑 여럿이 심방이라도 올라치면 그게 싫으셔서 막내 손주 며느리인 나를 방에 불러다가 앉혀놓고 저런거 다 우리네 옛날부터 비는 거랑 똑 같다. 왜 저렇게 동네 떠들석하게 몰려다니는지.... 들어봐라 몇살난 이름 뭐 라는 아이 건강하게 해주시고 몇살난 이름 뭐라는 이집 사위 일 잘되게 해주시고.... 안 그러냐? 새벽이면 세수하시고 머리곱게 빗으시고 옷매무시 정갈하게 여미시고 곧추 앉아 두손 모으시고 자손들 하나하나 헤아리던 시외할머님 * * * 작년에 자식이 많이 힘들었을 때 기도도 잘 안 될 때 어머니들이 떠 올랐다. 그리고 그 마음을 모두 모아 간절히 기도를 했었다. 아이가 역경에서 벗어났을 때 감사기도 드렸다. 어머니 어머니의 어머니에게도 감사를 드렸다. 이천십일년 이월 사일 교포아줌마(C)
-박광숙 작품 간구I 90.9 X 72.7 종이에 연필 2010 Korean Professional Artist Mall Festival 출품작-
노트: 벌써 삼년 전의 글이네요. 다시 올립니다. 항상 같은 마음이라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