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날이 좋았습니다.
하늘은 파랗고 바다도 파랗고 가끔씩 귓가를 스치는
사이다 같은 바람결도 부드럽기만 했습니다.
라벤다 밭에서 제일 먼저 피기 시작해서
만개의 절정에 있는 터커즈 어얼리(Tucker's Early)의 눈부시게 밝은 보랏빛
그 옆에 향기가 짙고 아주 깊은 보랏빛의 로든 블루(Lodden Blue)
그 옆에 단 냄새가 나며 보라색 꽃마다 보랏빛 솜털이 보오얀 로얄 벨벹(Royal Velvet)
그 옆에 키가 장대만하고 쑥 냄새가 나는 은회색 보랏빛의 실버 프로스트 (Silver Frost)
강한 향의 프로방스, 그로쏘, 덧치 화이트, 수퍼, 씨일, 자이언트 히드콭 등은
꽃봉오리를 채우느라 온통 발갛게 달아오르는 중이고
한 귀통이에 분홍색으로 피어나는 멜리싸의 하늘하늘한 몸매와 향기가
수줍은 신부의 모습으로
들을 채워가고 있습니다.
라벤다는 쑥처럼 그 종류가 다양합니다.
유월 중순 밝은 보라의 터커스 어얼리를 선두로
칠월 중순 프로방스, 그로쏘가 만개할 즈음엔
온 들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들고
서로 어우러진 향기가 그 절정을 이룹니다.
흰 안개 속에서
보랏빛으로 깨어나는 새벽의 들은
숨을 죽이게 합니다.
로덴 블루랑 멜리싸 그리고 프로방스 꽃망울들은 말려서 라벤다 차로 만듭니다.
진보라, 분홍, 은회색의 낱알들이 모여 보기에도 고은 차가 됩니다.
박하 정도가 낮은 종류들로 차를 만드는데 은은한 보라색이 우러난 차는
코로 시작해서 정수리 부분으로 향기가 올라가며 긴장을 확 풀어줍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출산의 산통을 돕는데 쓰였던 라벤다는
많은 약효 중에서도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제일 뚜렷합니다.
기절혼도하는 산모들 코에 라벤다 다발을 흔들어 깨우곤했답니다.
로마때에는 항생제로 쓴 기록이 있고 귀족들이 목욕물에 기름을 넣어 마음을 풀었답니다.
유럽에 발진티푸스가 창궐했을 때는 이에 물린 자국에 기름을 발라 항생제로 썼구요
온몸에 발라서 방충제로 쓴 것은 부유층에만 가능했다고 합니다.
작년에 나온 학술지에는 라벤다에 에스트로젠같은 효과가 있어서
라벤다 기름이 든 로션을 쓴 십대 소년 몇이 가슴이 발달한 예도 있답니다.
우리 들에 찾아오는 사람들 중에 갱년기 근처의 여인들이 향기에 취해
떠날 줄 모르는 것을 봅니다.
진보라의 로덴 블루를 칡덩굴로 짠 함지박만한 큰 바구니 하나 가득 따고 있는데
앨리스가 왔습니다.
같이 사는 매간이 한달 간 부모님 집에 다니러갔다 돌아오는데
라벤다로 기쁘게 해주고 싶답니다.
이 정도면 되겠냐하고 한묶음을 잘라주니 조금만 사겠답니다.
이웃간에 꽃을 팔다니 말도 안된다 펄쩍 뛰었습니다.
라벤다도 흐르고(flow)
우리도 흐르는데
아름답고 기쁜 순간들은
놓치지 말고 최대한으로 곱게 잡아놓자며
한아름 안겨주니
앨리스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집니다.
매간이 얼마나 깜짝 놀라며 좋아하겠느냐면서.
차를 돌려 라벤다 밭 사이 드라이브웨이를 빠져나가는 앨리스를 배웅하며
매간과 앨리스가 공항에서 만날 벅찬 기쁨이
내게도 잔잔히 전해져 왔습니다.
참 좋은 하루였습니다.
6월 27일 2007년
교포아줌마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