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이 낼 모레로 닥아왔다.
삼십년의 공백으로 살가운 사람 몇 안되는 서울에서 가만 있다간 남편이랑 둘이서 썰렁한 설 맞기 십상이다 싶어서
이미 신정에 차례랑 지내고 설을 다 쇤 시댁 식구들을 설에 초대했다.
모이는 사람에 대한 임무나 역활에 대한 기대 없이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빈손으로들 오시라고 했다.
스트레쓰 없이 편한 마음으로.
나는 놀며놀며 언저리에서 서성이는 본격적이지 않아도 되는 얼치기의 자유로움으로 음식을 장만하고.
* * *
사람 사는것 들여다보면 미국이나 한국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사람이 다 같다는 말이겠다. 미국에도 땡스기빙이나 크리스마스 때면 명절 스트레스(Holiday Stress)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명절 스트레스를 이겨 평안과 건강을 지킬 수 있는가하는 가이드들도 명절 때면 많이 나돈다.
흔한 명절 스트레스로;
-멀리 헤어져 사는 가족들이 오랜만에 만나는 명절에 화기애애함도 있지만 가족에 따라서 오래된 가족간의 갈등이 얽혀 빚어내는 각종 크고작은 불화가 생생히 다시 도지는 때이기도 하다.
미운정은 정이 아니다. 미운정이 고운정으로 변했다면 관계가 개선되어 평평해진 후에라야 가능한 것이다.
-이젠 다시 만날 수 없는 이별, 사별한 식구들 생각에 더욱 우울하고 외로움을 타는 때이다.
하나 있는 자식을 앞세우고 곧 뒤따라간 남편에 혼자가 된 선배는 설 무드가 시작하기도 전에 서둘러 서방의 사막으로 여행을 떠났다. 잘 한 일이다. 햇볕에 그을려 건강하게 웃고 돌아올 선배를 기다린다.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장소를 제공하는 측에선 침구, 음식 장만에 과로, 무리해서 명절 후엔 어느 기간 아팠다 일어나는 일이 허다하다. 미리 무리할 것을 걱정해서 명절 전에 불면, 불안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다. 명절 때면 진짜로 허리 디스크가 도지고 편두통이 재발하는 숱한 여자들...
-명절에 쓸 비용이 모자라 겪게 되는 스트레스도 한 몫 한다.
왜 다른 스트레스는 없겠는가.
* * *
설 상을 차린다고 부지런히 버스 타고 시장 다니는 맛이 참 쏠쏠하다.
누가 이래라 저래라 하지않고 내 맘대로 차리는 상이니 부담도 없고 즐겁다.
난생 처음 생도라지, 생더덕도 샀다.
제주산 생도라지라는데 미국에서 마른 도라지만 먹던 내게 껍질을 까고 찢을 때 나는 도라지 향에 호사스럽게 취했다.
볶을 요량이었지만 이 향을 살리고 싶어서 생채도 좀 하기로 했다.
진이 하얗게 나오는 더덕도 칼등으로 두들겨 펴고.
앞으론 마른 도라지, 마른 더덕은 못 먹을 것 같다.
조선산 이라고 명시된 북한에서 온, 타래도 곱게 지은 걸 선뜻 샀다. 우리 엄마 아버지 자란 그 고향 산천에서 온 고사리일지도 모른다는 반가움에.
뿌리가 굵고 분홍색인 노지 시금치도 사서 다듬어 맛을 보니 달기도 하다.
설 삼색 나물 준비하고
두부, 돼지고기, 숙주, 파, 당면 넣고 만두도 빚어 얼려 놓고 흰떡 썬 것 사다놓고 국물 낼 치맛살 사다놓으니 교포아줌마 얼치기 설 상 준비 다 되었다.
설 아침 밤, 잣, 콩, 은행 넣고 찰밥 지을 양으로 밤도 넉넉하게 깎아놓고.
생강, 계피 대추 넣고 수정과 물도 끓여 식혀 놓고....
참 호박찜도 하자. 진눈개비 나리는 오후 근처의 재래시장에 호박 사러 가니 정말 북적북적 흥청이는 명절 기분이 더 난다.
메밀묵도 하나 샀다. 아흔셋 이 불편하신 우리 시어머니 드시라고. 설 상에 묵도 놓나? 원래 격식없이 차리는 교포아줌마 음식인데 오는 사람 먹을 사람 위주로 하지 뭐 맘 편하게...
붕어빵아닌 잉어빵 파는 조선족 새댁이 너무 곱다.
한봉지 사면서 그녀의 고운 모습에 취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은 곳곳에 있는 것을)
잉어빵 먹으면서 둘레둘레 시장을 도는데 나물파는 할머니 맛있냐고 묻는다. 나눠먹으며 같이 언 손 녹이며 그 할머니 설에 올 자식들 이야길 들었다. 노점이라 진눈개비에 젖는 나물들이 안팔린다는 걱정도 함께.
남편은 친지 중 형편이 어려운 어른을 떠올렸다. 지방에 사시는 누지고 찬 그 어른댁을 방문하고 진심으로 따뜻한 온기를 바라는 인사를 드렸다.
열아홉에 처음 만난 이후 아직도 티격태격 아웅다웅하고 사는 남편이 가끔 괜챦아 보이는 때다.
아참 화투 두어벌 사는 걸 잊었다. 그 화끈하다는 고스톱 시숙들이랑 동서들이랑 함 배워서 쳐 봐야지.
이천십년 이월 십이일
서울에서 설 준비에 재미보는 교포아줌마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