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제일 재미난 TV 프로그램은 개그 콘서트의 '대화가 필요해.' 였다. 김대희가 동민이 아부이로, 나의 싸랑 봉선씨가 동민이 어무이로 그리고 우리의 동네북 아들 장동민 세식구의 밥상에서 벌어지는 광경인데 극중에서 운전기사를 하는 김대희는 자신의 장인의 '밥 묵자' 외에 별로 말이 없는 것에서 이 프로그램의 아이디어를 얻었단다. 이야기도 꺼내기 전에 세식구의 밥상 대화를 몇개 떠올리다 한바탕 웃고. 나는 웃기는 이야길 남한테 해주려면 너무 먼저 너무 웃어서 김이 다 빠진다고 남편이 절대 당신은 웃는 이야기 남한테 재탕 해주지 말란다. 웃는 이야기 빼고. 동민네 식구가 재밌는 건 한국의 대화가 안 통하는 사회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화를 이어보려는 우리의 봉선씨(팬클럽하면 당장 달려가겠슴)가 이리저리 둘러대보지만 어김없이 김대희의 버럭 고함 앞에 실패하곤 한다. 밥 묵자 하고 숟가락을 들기 전엔 아무도 숟가락을 먼저 들지 않는 그는 그집의 명실공히 절대권위 다. 관심을 끌어보려는 아내나 십대로서 이해를 구하는 동민이를 아랑곳 않고 자기 주장만 펴는 아부이다. 진정한 가족간의 대화를 외면한 채 내가 가장이라는 위치로만 권위를 고수하는 깨지기 직전의 그의 가여운 모습에서 문득 속을 터놓고 가까우면 권위가 떨어질까봐 누구하고나 '이미터' 간격을 두는 높으신 어른들 생각이 나곤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선생님들, 교수, 성직자, 의사, 공직자, 회사의 고위직들은 권위 유지를 위한 어느 정도의 거리 유지를 철칙으로 지키는 것 같다. 어떤 경우엔 주위의 사람들이 어떤 특정인을 그렇게 격리시키고 밀어 올려붙여 자신들이 속한 단체를 격상시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남편을 바쁘고 중요하고 귀하신 분으로 올려서 자신들의 위치를 높이는 일부 포부도 다부진 야심만만한 아내들 처럼. 만나기 어려운 분 청정고고하신 분 범접하기 어려운 분 오래 기다려 만난 보람이 있는 분 (기사를 이렇게 쓰는 기자의 정신상태도 우선은 문제지만 이런 기사의 표제들이 당연하게 통하고 받아들이는 사회가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니 결국엔 사회의 책임이다) 이런 종류의 잡지나 인터넽 기사를 읽을 때마다 나는 모인 자리에서 이야기에 쉽게 동격의 자세로 동참하고 쉽게 만나주고 편하게 자신의 집에, 오피스에 초대해주던 개중엔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높은 미국의 유명인사들을 떠올린다. 미국에선 유명한 사람이라도 가끔 괴팍한 성질의 개인들을 제외하곤 대부분 일로 누굴 만나려면 만남이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얼마나 접근이 쉬운가가(accessiblity) 그들의 장점과 강점이 되고 사회에서도 사람들을 쉽게 만나주는 것(availability)이 유능하고 좋은 사람의 평가기준이 되는 수가 많다. 리포트 건으로 담당 교수를 만나려는데 조교가 우선 교수의 그날 기분을 조마조마한 맘으로 살핀 후에도 또 그 교수의 사사로운 일정에 또 맞추어야했던 대학 시절을 생각하면 자신의 퍼스트 네임(이름)을 친구처럼 가깝게 부르게 하며 전화나 이메일 메시지엔 언제나 즉시 답을 주고 내 스케줄에 맞추어 자신의 귀가 시간을 늦추면서 까지 약속을 만들어 주던 대학원 시절의 교수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강단의 권위에 대해 '교수가 아는 것은 한정적이다. 내 지식과 아이디어를 새롭게 하는 것은 학생들이다'라며 아예 강단을 마다하고 학생들하고 같이 둘러 앉던 교수들.... 지금도 충격처럼 남아있는 말은 학부의 어떤 노교수의 유명한 미국학 강의의 첫시간에 칠판에 써 있던 '언제나 권위에 의문을 가져라! (Always question the authority!) 였다. 인간이던 학문이던 간에. * * * 미국의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직접 건강진단 결과를 즉각 전화해주기도 하고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주고 온갖 정보들과 혹시 의문이 있으면 이차적인 의견(2nd opinion이나 제삼의 의견을 받아보라고 권하고 필요할 땐 언제라도 다른 닥터들과의 의견 교환을 한다. 병원과 병원 사이, 어떤 땐 주를 넘어서, 나라를 넘어서도 다른 의견들을 경청한다. 환자를 치료하는 '내용'에 전념하는 모습으로 자신의 권위나 영광에만 신경쓰는 모습은 아니다. 근래에 가까운 식구가 암 수술을 했다. 환자의 아들이 서울의 대학병원에 교수로 있고 아들의 친구가 시술을 했다. 환자의 나이, 상태를 보아 시술 방법이 좀 의외라 싶어 피붙이인 울 남편이 의사에게 이유를 듣고 싶어하자 의사인 환자의 아들이 기겁을 한다. 절대 물어볼 수 없다. 고 의사인 환자의 남편도 마찬가지 태도를 보인다. 알고는 싶지만 예의상 물어보는 것은 실례가 된다는 것이다. 담당의사가 말을 꺼내지 않는 사항을 묻는 것은 커단 실례라니? 아니 환자나 그 가족이 제일 상세하게 보고 받아야하는 것 아닌가? 누구의 몸인데... 더 웃기는 건 한번 의사를 정한 다음엔 절대 다른 의사에게 제이의 의견을 물울 수 없다는 것이다. 제이의 의견(2nd opinion)을 묻는 것은 담당의사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고 못 믿겠다는 태도로 아예 의사를 바꿀 각오를 해야한다는 한국 의료계 권위의 현실이다. 크고 작은 많은 독불장군들.(Big egos). 내가 다니던 미국 교회의 목사들은 한결같이 자신을 퍼스트 네임으로 소개하고 그렇게 불리워지길 원했다. 목사는 외롭기 쉽다고, 친구가 되어 달라고 가끔 우리 식구들을 집으로 초대해 자신의 가족들과 만나게하고 직접 바비큐를 손수 굽고 샐러드를 만들어주던 목회자들도 몇 생각난다. 두엇은 오랫동안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너무나도 서열 질서 정연한 한국의 단체들에서 권위를 내세우고 거리를 두어 의사불통 내지 지연을 조장하는 모습에서 어딜가도 아직도 구태의연한 공자왈만 보인다. 의사소통이 현대 사회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라면 권위와 독선이 판치는 사회는 효율면에서 생산면에서 낭비가 많고 쇄신이 안되는 사회이다. 한국의 대기업 산하의 회사에 이년간 자문을 했던 영국 친구 데이비드는 모임에선 왜 언제나 똑똑한 사람이 하나만 있어서 혼자서만 줄창 이야기하느냐고 의아해해서 '그 혼자 떠드는 사람이 그 중에서 서열이 가장 높은 사람'이라고 귀끔해주었더니 함구무언으로 침묵하는 그 젊은이들의 에너지와 아이디어가 얼마나 낭비냐고 턱을 떨어뜨리며 안타까와했다. 그러고보니 식탁에서도 제일 활개치고 제일 많이 떠들고 맛있는 것을 자신있게 먹어치우는 사람이 항상 그 모인 중의 우두머리였다며 아하! 했다. 동민이 아부이가 의외로 많은 한국 사회다. 구태여 코미디 프로그램이 아니라도. 사족: 웃음거리로 만드는 건 변화의 시작이다. 이천구년 이월 교포아줌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