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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한기
꽃이 지고 손이 쉬니 손끝에서 꽃이 만들어집니다.
딸 많은 집 딸이라
어린 남동생을 보며 아버진 위로 난 딸들 중
나 하나쯤은 아들이었슴했던 걸 압니다.
아주 여자중에도 여자 같이 생긴 내가
톰보이로 딱지먹기 자치기 구슬치기에 열을 올리고
중 고딩 시절 수예 선생님한테 유명하게 수 못(안)놓는 학생으로 통했었는데.
이렇게 느즈막한 나이에 수로 재미를 볼 줄 누가 알았을까요.
재료는 모두 최고급 비단으로 씁니다.
들이는 공이 제겐 너무 귀해서요.
공단, 옥명주등
밑그림이 없이 빈 화폭에 붓 가듯이 바늘 가는대로 실 가는대로
평소에 뜰에서 보아온 꽃들을 옮겨 봅니다.
민들레랑 모시풀이 이리 곱게 피었습니다.
겨자꽃도 넣고 달도 해도 띄우고.
민들레 꽃씨를 수 놓다 보니 아주 재미있어서
한동안 폴폴 날리는 민들레 꽃씨들을 라벤다 향낭 거죽에 폴폴 날려
수놓았는데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나누어주어서 하나도 안남았네요.
내가 예술가는 아니더라도 예술가 성질은 타고 난 것 같습니다.
똑같은 모양의 수는 절대 다시 못 놓습니다. 지루해서요.
한참 재미들여 수놓아 향낭을 만들어 줄 때는 몰랐는데
더러는 사진이라도 찍어놓을 걸 하는 미련이 들 만큼 꽤 분위기 있는 것도 있었어요.
그래도 어느 손끝에서 사랑받고 있으면 된거지요.
향낭을 건넨 마음이나 받은 마음이나 그 순간엔 무척 훈훈하고 기뻣거든요.
이번 아픈 동안에 누워 있기 지루해서 정신 날 때
뚜벅뚜벅 실땀으로 놓아서 주위에 보고 싶은 사람, 고마운 사람들을
떠올리며 향낭을 만들었습니다.
수 솜씨에 엉성함이 묻어납니다.
손끝이 여물 상황이 아니었거든요.
고통중이어서였는지
제 딴엔 쉴 휴를 그림으로 풀어봤습니다.
그런대로 마음에 듭니다.
그런데 등이 너무 곧아서 푹 쉬어 보이지 않는군요.
아예 머리랑 등을 푹 기대고 발을 주욱 벋으니 제법 푸욱 쉬는 느낌입니다.
벚꽃 같이 화사한 웃음을 아주 드물게 웃는 친구에게 항상 그렇게 웃으라고
꽃분홍 갑사를 바탕으로 해서 선물했습니다.
마음이 덜 쉬었는지 아래의 인물은 좀 긴장되어 보입니다.
등이 한동안 새우처럼 휘인 중이었던 것 같습니다.
어울릴 화 자가 마음에 많이 머문 가을이었습니다.
올가을은 딸 것들이 거둘 것들이 풍성했습니다.
벼 화 변에 입 구 가 합친 글자.
배가 부르면 우선 하하호호 화목해지고 싸움이 없어지구요.
진보라 옥명주에 벼화 변엔 벼이삭 하나 황금빛으로 익혀서 올리구요.
옆에 먹는 입, 웃는 입 동그랗게 그려넣었습니다.
다음엔 벼 화자를 아예 알곡을 많이 단 벼이삭으로 풀어봐야겠어요.
입에도 앞니 두어 정도 넣어 웃게 하구요.
글자를 풀어 그림을 그려 상형의 때로
거꾸로 세월을 거스러봅니다.
너무 너무 재밌습니다.
지난 이년 간
눈에 익은 꽃들을 이렇게 올려서 주위에 나눈 것이 수십개나 되었는데 남은게
이 꽃 하납니다.
이런 종류의 디자인은 아마 다시 수놓지 않을 거 같아요.
한동안 글자를 그림으로 푸는 일을 즐길 것 같습니다.
내 나름의 예술이니까 그러저러 변해가는 라벤다 향낭의 모습도
재밌네요.
이천구년 십일월 십이일
예술하며 재미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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