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그 서울에 떠오른 해 이리로 던지세요.
여기서도 설 맞게요.
자 던진다 받아. 새해 복많이 받아
형니임두요오
어제 구정에 모인 시댁 식구께 전화 세배드리면서
저랑 거리낌없이 가까운
저의 바로 위의 동서와 주고 받은 이야깁니다.
고국의 명절을 달랑 멀리 떨어져 전화로 참석해 쇠는 것이 이민자네요.
* * *
오늘은 구정
떡만두국, 도라지 고사리, 시금치 삼색 나물 무치고, 녹두 빈대떡 부치고
이웃 사촌 슬기네는 잡채 해온다 하고 준서네는 김치랑 김 구워온다하니
설상 떡 벌어질 판입니다.
* * *
이런저런 명절이 오면
이십대 초에 월남해서 돌아가실 때 까지 망향자로
사신 저의 아버지의 쓸쓸함을 기억하곤 합니다.
설이나 추석때면
이북에 계신 부모님의 생사도 몰라
남들 처럼 제사도 못지내고
고향의 흥청이던 명절 생각에
홀로 쇠는 명절의 쓸쓸함을
자식들 앞에 어쩔 수 없이 들키곤 했습니다.
* * *
아버지는
한자식 두자식 건너와
어느 덧 거의 모든 자식들이 살고 있는 미국으로
육십세가 가까와진 나이에
늦은 이민을 해서
그나마 정든 제이의 고향 서울을 또 떠나왔습니다.
'한번 떠난 고향, 두번 못떠나랴.'
말다르고 기후 다르고 사람 다른 태평양 건너 이질의 땅으로 옮겨 오면서
죽기 아니면 살기의 각오에서 나온 말이었을 것이 짐작이 갑니다.
칠순 생신 때
먼저 월남한 남편을 찾아
어린 남매 등에 업고 걸리며 필사로 삼팔선 넘어와서 함께 늙은 아내
그리고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손주들 한집 그득 모여 잔치할 때
아버지는 놀랍게도
'타향살이 몇해던가'를 부르셨습니다.
그것도 아주 막힘없이 편하게 불렀습니다.
우리 자라날 때 아버지가 '타향살이'부르는 걸 들은 적이 없거든요.
가족들의 앵콜 박수에 답사로
'난 일생 고향을 그리고 살았다.
뛰어넘어 달려가면 한 숨에 갈 것 같은 거리에 고향을 두고
꿈에도 몇번이나 고향집에 가서 어머니, 아버지도 만나고 동생들 친척 친구들도 만나곤 했다.
항상 고향에 돌아갈 날을 기다리며 살았다.
지금 생각하니 인생 많이 허비한 생각이 든다.
너희들 다 나같은 고향 떠난 사람들 아니냐?
어디나 정붙이고 살면 고향이다.
어디이던 사는 데를 고향이라 생각하고 이웃 사촌들 만들고 열심히들 살아라.'
다들 숙연해졌습니다.
아버지가 그 때야 비로소 귀향을 포기하신 걸 알았지요.
타향살이 노래는
고향이 너무도 사무치게 그리울 땐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핏빛 망향의 노래로 가슴에 품고만 산 나의 아버지.
그 노래가 편하게 나올 때쯤
몇해 안있어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태평양 바다가 보이는
양지바른 언덕에 영어로 쓰인 비석에
코리아의 평안북도 무슨군 무슨면 무슨동네 살던
아 무 개
이름 석자 달고 잠들어 계신 나의 아버지
아버지
오늘 저녁 이웃 사촌들 모여 윷놀이 하면서
아버지 부르신
그 타향살이 한 번 부르렵니다.
구정날
둘째딸 올림